[뉴스토마토 김지평 기자] 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얼어붙고 있습니다. 정부의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2021년만 해도 15조원이 넘었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12조원 규모에도 못 미치는 실정입니다. 대·중견기업들의 투자도 줄어 벤처·스타트업의 자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성장 국면일수록 국가 경제 성장을 위해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12일 벤처기업계에 따르면,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크게 위축된 상태입니다. 고금리, 고환율 등 대내외 리스크 증가에 따른 것이란 분석입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 2월 발표한 '2024년 국내 벤처투자 및 펀드결성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11조9457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전년과 비교해 9.5% 증가한 수치이지만, 2021년과 2022년에 비하면 줄어든 규모입니다.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2021년 15조9371억원을 기록한 뒤 2022년 12조4706억원, 2023년 10조9133억원으로 하락하다 지난해 반등했습니다.
다만 반등한 국내 벤처투자 규모도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입니다. 나원주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 부소장은 "우리나라의 벤처투자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0.26%로, 이스라엘(1.72%)이나 미국(1.09%)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지난 1월 발표한 벤처투자플랫폼 더브이씨의 ‘대·중견기업 2024년 투자 현황’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대·중견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는 2023년 218건에서 지난해 120건으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투자도 지난해 9996억원을 기록하며 2023년(1조1676억원)과 비교해 1680억원 줄었습니다.
미국·중국·싱가포르, 스케일업 지원 성공 사례 다수
싱가포르 테마섹 건물.(사진=연합뉴스)
이에 정부가 벤처·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위해 공적자금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국가 경제를 살리는 전략일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과 중국 등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 투자를 이끌어 낸 사례가 다수 있습니다. 정부가 벤처·스타트업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등 마중물 역할을 감당하고, 민간 투자자에게 세제지원 등의 혜택으로 민간 투자를 견인하는 방식입니다. 이같은 방식으로 정부와 민간합동 지원을 받은 벤처·스타트업 기업은 각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인 미국의 GAFAM(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MS) 등은 대표적인 스타트업 출신 기업입니다.
일례로 세계 1위 드론 기업 DJI는 중국 정부가 투자해 설립한 '중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했습니다. DJI 성공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중국 선진 시장 정부는 2003년 통용 항공 비행 관제 조례를 제정하고 드론 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중국 선전 지방 정부의 지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선전시 저고도 경제 고품질 발전 지원조치'를 발표했는데, 기업당 최대 6000만위안(약 117억원)을 핵심 기술·부품 개발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아울러 싱가포르의 테마섹 펀드는 정부 주도로 벤처·스타트업을 스케일업한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싱가포르 테마섹은 운용 자회사를 통해 싱가포르의 자본시장에 직접 투자합니다. 펀드에 출자할 때 민간 투자를 견인하기 위해 민간 투자자에게 초기 손실의 위험성을 일정 부분 감수하는 대가로 높은 수익 배분 비율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정부와 민간의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조절해 민관합동 투자를 견인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현재 테마섹이 운용하는 자산은 한화로 약 81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테마섹은 지난 20년간 연평균 7%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투자기관으로 성장해, 싱가포르의 명실상부한 국부펀드가 됐습니다.
앞서 언급된 이스라엘이 '스타트업 네이션'(창업국가)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요즈마 2.0 펀드 덕분입니다. 요즈마 펀드는 1993년 이스라엘 정부가 설립한 국부펀드로,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설립됐습니다. 펀드 설립 초기에는 정부가 자본을 제공하고 민간 투자자들이 추가 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로 운용됐습니다. 현재의 요즈마 2.0은 이스라엘 정부가 총 6억8000만세켈(약 2580억원)을 벤처캐피털(VC)에 투자하고, VC는 매칭 형식으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요즈마 펀드로 이스라엘 VC 시장이 발전하면서 현재 창업 생태계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벤처·스타트업 스케일업, 정부의 '마중물' 역할 필요해"
지난해 6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박람회 '넥스트라이즈 2024'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사진=뉴시스)
전문가들은 벤처·스타트업 성장을 위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구자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벤처·스타트업 투자 시장에서 정부가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장 중심으로 벤처투자가 이뤄지는 미국도 초반 연구개발(R&D)이나 기술개발 등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부가 역할을 해왔다"며 "현재와 같이 고금리 등 악화된 금융시장을 고려해서라도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 선임연구위원은 싱가포르의 테마섹 펀드를 언급하며 스케일업 펀드의 필요성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정부의 모태펀드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우리나라 벤처 생태계에서는 10년 이상을 견뎌줄 수 있는 펀드가 거의 없다"고 짚었습니다.
이어 "스케일업 펀드 조성은 유망한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이 되는 성과를 만드는 데 정부가 역할을 하라는 의미"라며 "스케일업 펀드도 역시 정부가 리스크를 일정 부분 떠안고 10년 이상 정부가 꾸준히 안정적으로 투자해야 민간 투자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지평 기자 jp@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