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닌 국가에 의한 기본권 침해”라는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은 옳고 의롭다. 당분간 큰 선거가 없으니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할 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잃은 것은 투표용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국민의 신뢰였다. 선거관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치로서, 부실해지면 민주주의의 근간과 제도적 기반 시설이 무너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고 평가받던 청년들이 공정성과 참정권 침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들은 정파 간의 정쟁에 무관심했을 뿐, 공정성과 민주주의 가치에는 매우 민감하고 양보하지 않는다. 민주 대한민국의 든든한 미래세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선거관리 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는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자산이 되어버렸다. 국회의원이 무능하거나 부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대신 법을 만들 수 없고, 사법부가 실망스럽다고 판사 아닌 자가 재판할 수 없듯이 선거 민주주의를 담당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해체하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제대로 거듭나게 하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안팎의 결단과 실행이 절실한 시점이다.
선거공영제의 확대, 선거운동의 자유, 선거 비용의 엄격한 제한을 현행 공직선거법의 기본 원리로 채택하면서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이 매우 막중해졌다. 그러나 선거 과정의 공정한 관리자로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게 주어진 헌법기관의 독립성이 책임 회피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울타리가 아니라 폐쇄적 특권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승만 시기에 경험한 미증유의 3·15 부정선거로 인해 1960년 제2공화국 헌법부터 ‘중앙선거위원회’를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명문화하는 헌법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선거와 민주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에 명칭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격하시켰으며, 군사독재 장기 집권 기간 동안은 존재 가치가 거의 없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987년 6·10 항쟁과 더불어 부활했다. 선거민주주의의 공정한 관리, 정당정치 발전 지원, 민주시민 교육 등으로 업무 영역을 확대했다. 한때는 나이지리아·콩고·이란 등 제3세계에 선거관리의 경험과 신속 관리 시스템의 민주주의 상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반복되는 실수는 제도의 문제다. 급기야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참정권 침해를 초래한 선거관리위원회의 개혁은 어느 선까지 가야 할까?
줄탁동시(?啄同時) 정신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안팎에서의 충격 요법과 환골탈태의 해법이 필요할 때다. 엄정한 강제수사를 통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입법적 해결 방식이 동시에 구사되어야 한다. 대통령과 4부 요인의 신속한 만남은 입법적·사법적·헌법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시의적절한 대응이었다.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6·3지방선거 홍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부 직무 수행 능력과 역량을 천지개벽하려는 의욕과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권 삭풍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할 것이고, 국민과 미래세대들은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이 유지되고 그 필요성이 인정받으려면 모든 구성원이 공정성이라는 제1의 가치를 뒷받침할, 전문성·책임성·투명성·윤리성·중립성의 다섯 가지 덕목을 두루 갖추도록 서로를 감시하고 독려해야 한다.
아무쪼록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진정으로 거듭나서 K-민주주의의 빈칸을 시급히 메워주길 기대한다. 두 번의 촛불혁명을 완수한 대한국민은 지금 부끄럽다.
박상철 (사)미국헌법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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