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장고 끝에 재상고를 택한 배경에는 9440억원에 달하는 재산분할액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의 재산분할 기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에도 파기환송심에서 분할 비율이 크게 낮아지지 않은 데다, 당장 1조원에 가까운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 현실적 부담까지 겹치면서 다시 법리 판단을 받아볼 필요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지난 6월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산 분할 파기환송심 2차 조정 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5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최 회장 측은 파기환송심에서 결정된 9440억원의 재산분할액과 산정 방식에 대해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최 회장 측 법률대리인단은 전날 “여러 사정을 고려해 고심 끝에 상고장을 제출했다”며 “주주들과 그룹 경영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자세로 향후 절차에 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핵심은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제시한 판단이 파기환송심에 충분히 반영됐느냐는 것입니다.
앞서 항소심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이 보유한 SK㈜ 지분 형성의 종잣돈이 됐다고 보고 이를 노 관장의 기여로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최 회장에게 위자료 20억원과 재산분할 1조380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이 판단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SK 선대회장에게 300억원을 지원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해당 자금의 출처가 노 전 대통령 재직 기간 수수한 뇌물이라면 이를 노 관장의 재산 형성 기여로 볼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불법적인 자금이라는 점에서 재산분할의 기여 재산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입니다.
때문에 파기환송심에서는 재산분할 비율이 항소심보다 크게 낮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파기환송심이 정한 노 관장의 분할 비율은 33.3%로 항소심의 35%에서 1.7%포인트 낮아지는 데 그쳤습니다. 비자금 300억원을 분할 대상에서 제외하면서도 노 관장의 가사·양육 및 대외활동 기여 등을 인정해 SK㈜ 주식 등을 분할 대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최 회장 측이 특히 문제 삼는 부분은 SK㈜ 주가 상승분을 재산분할에 반영한 방식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파기환송심은 항소심 변론종결 이후 SK 주가가 상승한 사정을 분할 비율에 반영해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을 9440억원으로 산정했습니다. 변동성이 큰 상장사 주가의 상승분을 재산분할 비율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가 재상고심에서 법리적 쟁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SK실트론 지분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한 것 역시 최 회장 측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으로 꼽힙니다. 최 회장은 2017년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통해 당시 LG실트론 지분 29.4%를 인수했습니다. 이 시기는 최 회장과 노 관장의 혼인 관계가 이미 사실상 파탄에 이르렀던 시점인 만큼, 이를 분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최 회장 측 입장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실적인 재원 마련 문제도 재상고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최 회장은 당장 9440억원의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판결이 확정될 경우 지급하지 않은 금액에는 연 5%의 지연이자가 붙어 하루 약 1억3000만원의 이자가 발생합니다. 재상고를 통해 판결 확정을 늦추면 일단 이자 부담을 미룰 수 있습니다.
더욱이 1조원에 가까운 현금을 단기간에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SK㈜ 주식을 매각하려면 내부자거래 사전공시제도에 따라 일정 기간 전에 거래 계획을 공시해야 하며, SK실트론 지분을 처분하더라도 경영권 프리미엄이 없는 일반 지분으로 평가될 경우 실제 매각가가 법원이 산정한 가치보다 낮아질 수 있고, 세금까지 고려하면 손에 쥐는 현금은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재계에서는 결국 SK㈜ 지분 매각까지 이어질 경우 그룹 경영권과 주식시장에 미칠 파장도 무시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최 회장 측이 일부 주식으로 재산분할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노 관장 측이 전액 현금 지급을 고수하면서 합의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재상고심에서 결론이 바뀌기는 쉽지 않습니다. 재상고심은 법률심이어서 원칙적으로 사실관계를 다시 판단하지 않고, 파기환송심이 대법원의 파기 취지를 제대로 따랐는지를 살핍니다. 이미 대법원이 한 차례 법리 판단을 내린 사건인 만큼 재상고를 통해 재산분할액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전망입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최태원 회장 측 입장에서는 법률적 판단을 다시 받는 것을 비롯해 재원 마련 시간도 확보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소송 리스크 장기화와 경영 불확실성 지속 등 부담은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세은 기자 os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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